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은 원나라 순제의 장남으로, 고려 출신 기황후의 아들로 1340년에 태어났다. 1353년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정치적 갈등과 혼란 속에서 1370년 북원 황제에 즉위했다. 명나라의 공격으로 인해 수도를 옮겨 다니며 저항했으나, 1378년 카라코룸에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튀르크계 아시아인 - 원 혜종
원 혜종은 원나라의 제11대 황제이자 북원의 초대 대칸으로, 권신들의 발호와 홍건적의 난으로 국력이 쇠퇴하여 명나라에 의해 대도를 빼앗기고 북원을 건국하여 저항하다 사망했으며, 고려 출신 기황후와의 사이에서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았다. - 튀르크계 아시아인 - 원 문종
원 문종은 원나라의 제9대 황제이며, 유배 생활과 쿠살라와의 황위 쟁탈전을 겪었으며, 불교와 유학을 장려했으나 엘테무르의 독재로 정치적 쇠퇴를 겪고 29세에 사망했다. - 1378년 사망 -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그레고리오 11세는 아비뇽 유수를 끝내고 교황청을 로마로 되돌린 프랑스 출신의 교황이나, 위클리프 사상 단죄, 팔성인 전쟁 개입 등 보수적 면모와 그의 사망 후 서구 대이교 발생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의 전환점을 보여준다. - 1378년 사망 - 효강황후
효강황후는 명나라 태자 주표의 비로 건문제와 홍광제에게 추존되었으며, 주윤을 낳았으나 1378년에 사망하여 상우춘과 합장되었고, 영락제에 의해 태자비로 강등되었다가 홍광제에 의해 시호가 복원되었다. - 튀르크계 몽골인 - 원 혜종
원 혜종은 원나라의 제11대 황제이자 북원의 초대 대칸으로, 권신들의 발호와 홍건적의 난으로 국력이 쇠퇴하여 명나라에 의해 대도를 빼앗기고 북원을 건국하여 저항하다 사망했으며, 고려 출신 기황후와의 사이에서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았다. - 튀르크계 몽골인 - 정유휘성황후
정유휘성황후는 카를루크족 출신으로 원 명종 쿠살라의 비이자 원 혜종 토곤테무르의 생모이며, 쿠살라 망명 당시 인연을 맺어 토곤테무르에 의해 황후로 추존되었으나, 생존 시점과 출신에 대한 상반된 기록과 논란이 존재한다.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아유르시리다라 |
몽골어 이름 | ᠠᠶᠣᠰᠢᠷᠢᠳᠠᠷᠠ |
중국어 이름 | 愛猷識理答臘 |
칸 호칭 | 빌릭투 칸 |
몽골어 칸 호칭 | ᠪᠢᠯᠢᠭᠲᠦ ᠬᠠᠭᠠᠨ |
중국어 칸 호칭 | 必里克圖汗 |
사후 시호 | 무승화효황제 (武承和孝皇帝) |
묘호 | 소종 (昭宗) |
출생일 | 1340년 1월 23일 |
사망일 | 1378년 4월 28일 ~ 5월 26일 사이 |
사망 장소 | 카라코룸, 북원 |
매장 장소 | 기련곡 (몽골고원) |
아버지 | 토곤 테무르 |
어머니 | 기황후 |
배우자 | 권황후 |
재위 | |
즉위일 | 1370년 5월 23일 |
퇴위일 | 1378년 4월 28일 또는 1378년 5월 26일 |
대관식 | 1370년 5월 23일 |
연호 | 선광 (宣光, 1371년–1378년) |
왕조 및 가문 | |
왕가 | 보르지긴 |
왕조 | 북원 |
가문 | 쿠빌라이 칸 가계 |
자녀 | |
자녀 | 2명 |
아들 | 마이다리팔라 |
언어별 이름 | |
몽골어 | ᠠᠶᠣᠰᠢᠷᠢᠳᠠᠷᠠ |
산스크리트어 | आयुष्य तल् |
중국어 | 愛猷識理達臘 |
리투아니아어 | Ayurširidara |
몽골어 칸 호칭 | ᠪᠢᠯᠢᠭᠲᠦ ᠬᠠᠭᠠᠨ |
리투아니아어 칸 호칭 | Biligtü Khan |
2. 생애
1353년 황태자가 되었고,[13] 점차 정치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나, 정치에 의욕을 잃은 혜종 치하에서 권력을 장악했던 고위 관료들은 황태자의 권력 찬탈을 달가워하지 않아 그들과 대립했다.
1364년 반(反)황태자파는 대동(大同)을 근거지로 하는 군벌 보로트 테무르(Bolot Temür)를 수도 대도(大都)로 불러들였다. 아유르시리다라는 대도를 떠나 보로트 테무르의 정적이자 하남성(河南省)의 군벌 코코 테무르(Koko Temür)를 의지하여 태원시(太原市)로 도망쳤다.[14] 1365년, 아유르시리다라는 코코 테무르에게 명하여 보로트 테무르를 토벌하게 하고, 대도로 돌아와[14]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 내분의 결과, 원(元)나라 군대는 질(質)과 양(量) 모두 참담한 상황에 놓였다. 1367년 아버지 혜종은 아유르시리다르를 중서령(中書令)·추밀원(樞密院)사에 임명하여, 행정과 군사에서 칸(汗)과 맞먹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 사이 강남(江南)에서는 주원장(朱元璋)이 착실히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1368년, 하남(河南)에서 방어에 임했던 코코 테무르의 군대가 주원장(朱元璋)이 건국한 명(明)의 북벌군에 패배하여 대도(大都)를 지킬 군사력을 잃었다. 아유르시리다라는 아버지와 함께 대도(大都)를 버리고[13] 몽골 고원(蒙古高原) 남부의 응창부(應昌府)로 달아났다. 1370년 4월 17일(음력)에 아버지가 응창부(應昌府)에서 죽자 칸(汗)에 즉위했으나, 이문충(李文忠)이 이끄는 명(明)나라 군대에 틈타 다음달 5월에 응창부(應昌府)에서 쫓겨나, 수십 기(騎)를 이끌고 몽골 고원 중앙부의 옛 수도 카라코룸(カラコルム)으로 도망쳤다.[13] 카라코룸에 도착해 있던 코코 테무르에게 국정을 맡기고, 연호(元号)를 선광(宣光)으로 정했다.[13] 이후 몽골 고원으로 달아난 군대와 합류하여 체제를 재정비했다.
1372년 1월, 명(明)의 서달(徐達)이 이끄는 대군이 몽골 고원에 침입하여 카라코룸에 다가오자, 코코 테무르의 활약으로 톨 강(トール川)·령북(嶺北)에서 명(明)나라 군대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13] 그 후 한지(漢地) 재탈환을 목표로, 코코 테무르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군대를 남하시켜, 한때 산서성(山西省) 북부까지 세력을 회복했지만, 1375년에 코코 테무르가 죽자 반격도 중단되었다. 1378년 카라코룸에서 사망했고, 이복동생으로 여겨지는 토구스 테무르(Toghus Temür)가 뒤를 계승했다.
2. 1. 생애 초반
1338년 또는 1339년 1월 23일 원나라 대도(황궁) 또는 카라코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원 순제 토곤 테무르였고, 어머니는 고려인 기자오의 딸 기씨 올제이 후투였다. 이름은 아유르시리다르로 정해졌는데, 산스크리트어 '아유르'(аюур, 장수, 치료자)와 '시리다르'(сридар, 길탁(吉度)함, 복된 삶, 지도자, 우두머리, 고귀함)의 조합어였다.[2] 일설에는 산스크리트어로 무기를 뜻하는 아유트(அயுத்து)와 시리다르의 조합어라는 설도 있다.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1339년 출생설, 1340년 출생설 등이 있다.[2]기황후는 순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몽골 귀족들은 고려인의 피가 섞인 아유르시리다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4] 아버지 혜종은 아유르시리다르를 바로 황태자로 책봉하지 않았다. 아유르시리다르는 한족의 전통 문화에 호의적인 토크토아의 집에 보내져 양육되었다.[4] 그는 유년기에 토크토아의 문하에서 중국어와 한학, 중국 문화를 배웠다.[4]
2. 2. 황태자 시절
1340년 6월 부다시리 카툰이 황태후에서 폐위되고, 사촌동생 엘 테구스와 함께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메르키트 바얀 일파가 숙청된 뒤, 아유르시리다르는 잠정적인 후계자로 공인되었다. 1348년 또는 1349년 7월 3일 혜종은 대도 황궁에 아들을 위한 성리학 서당을 설립하고 학자들을 초빙했다. 1353년 혜종의 정궁 황후 바얀 후투그 카툰이 아들 친킴을 낳았으나 2세에 요절했다.1353년 아유르시리다르는 모후인 기황후와 일부 세력의 지지를 얻어 제위를 탈취하려다가 실패했다. 기황후는 고려인 환관, 관료들을 비롯 일부 비옹기라트계 세력을 포섭했다. 1353년 6월 2일 황태자에 지명되고, 곧 중서령(中書令)과 추밀사(樞密使)를 겸하게 되어 행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그해 7월 혜종은 이를 기념해 대사면령을 내렸다. 아유르시리다르는 황태자가 되었으나 정궁 바얀 후투그에게서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토크토아는 그의 태자 책봉을 계속 미뤘다.[5] 7월 황태자가 된 뒤 아유르시리다르는 토크토아를 숙청하려고 시도했는데, 훗날 토크토아의 문하생인 하마(哈麻, 하마)로 하여금 토크토아를 모함하게 하여 그가 홍건적과 싸우는 도중에 부정축재를 행했으며 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실각시켰다.[5] 1354년 바얀 후투그 황후가 낳은 적자 친킴이 2세로 요절했다.
1354년 가을 토크토아는 반군 지도자인 장사성(張士誠)의 근거지인 고우(高郵)를 포위하고, 28회의 교전 끝에 함락시켰다. 아유르시리다르는 토크토아가 자신의 태자책봉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중서성 평장정사 하마(哈麻)로 하여금 탄핵하게 하여, 토크토아를 갑자기 해임시키고 하이난으로 유배보냈다.[5] 1355년 4월 20일 아유르시리다르가 황태자의 인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부황 순제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순제는 정치에 흥미를 잃어버렸고 아유르시리다르가 대신 정무를 주관했다. 반황태자파는 다퉁 지역의 군벌 볼라드 테무르를 수도 대도로 불러들였다. 아유르시리다르는 대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볼라드 테무르의 정적, 허난성의 군벌 코케 테무르에게 의지하여 타이위안으로 피신했다.[14]
1356년 2월에는 하마가 동생 시시(雪雪)와 함께 아유르시리다르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6] 기황후 역시 아유르시리다르를 황제로 앉히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당했다.
1364년 반(反)황태자파는 대동(大同)을 근거지로 하는 군벌 볼라드 테무르를 수도 대도(大都)로 불러들였기에, 아유르시리다라는 대도를 떠나 코케 테무르를 의지하여 타이위안으로 도망쳤다.[14] 이듬해 1365년, 아유르시리다라는 코케 테무르에게 명하여 볼라드 테무르를 토벌하게 하고, 대도로 돌아와[14] 정권을 장악했다. 1367년, 아버지인 황제에 의해 중서령(中書令)·추밀원(樞密院)사에 임명되어, 행정과 군사에서 칸(汗)과 맞먹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2. 3. 북원 황제 즉위와 통치
1368년 명나라의 공격으로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잃고 상도로 피난했다.[7] 1370년 아버지 순제가 응창에서 사망하자, 아유르시리다르는 응창부에서 황제에 즉위했다.[7][13] 즉위 후 연호를 선광(宣光)으로 정하고, 카라코룸으로 도망쳤다.[8][13]빌리그트 칸은 코케 테무르를 총사령관이자 중앙 정부의 우익 친상(칭상, 蒙古貴族)으로 임명했다.[8]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몽골 본토의 원(元) 잔여 세력인 북원은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8] 그들의 영토는 동북 중국에서 신장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포함했다.[8]
명나라 홍무제는 빌리그트 칸 아유르시리다라에게 여러 차례 항복을 요구했지만 실패했다.[9] 1372년, 홍무제는 15만 명의 명나라 군대를 몽골로 파병했다.[9] 빌리그트 칸은 코케 테무르의 군대를 서달이 지휘하는 명나라 군대의 중앙 부대에 맞서 보냈다.[9] 서달의 군대는 20일 만에 투울강에 도착했으나 패배했고, 서달은 간신히 몇 명의 부하와 함께 탈출했다.[9] 명나라 군대의 동부 부대는 케를렌강으로 진격하여 이동 중에 몽골 진영을 약탈했으나, 갑자기 패배하여 오르혼으로 후퇴했고, 그곳에서 또 다른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9] 그 후 그들은 할라자차니가 이끄는 몽골군과 싸웠고 결국 카라코룸 근처에서 패배했다.[9] 명나라 군대의 서부 부대는 다른 부대의 실패로 인해 후퇴해야 했지만 일련의 지역을 점령했다.[9]
아유르시리다라는 중국 명나라에 맞서 싸우기 위해 원의 옛 속국인 고려 공민왕의 지원을 요청했다.[10] 빌리그트 칸은 공민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민왕이시여, 당신은 저와 마찬가지로 칭기즈칸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이 하늘 아래 정의와 진실을 세우는 데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10]
그러나 고려 공민왕은 돕기를 거부하고 몽골에 대한 반대 정책을 시작했으며, 1270년대에 원나라가 병합했던 땅을 되찾았다.[10] 홍륜과 최만생은 1374년에 공민왕을 시해했다.[10] 이인임은 그들을 죽이고 요양의 몽골에 사절을 보냈고, 빌리그트 칸은 이인임의 꼭두각시인 우왕의 정통성을 신속하게 인정했다.[10] 빌리그트 칸은 고려에 명나라 요새에 대한 공동 공격을 위해 군대를 파병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고려 조정은 다시 조심스럽게 돕기를 거부했다.[10]
2. 4. 한족 지역 수복 시도와 최후
1373년, 아유르시리다르는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를 공격했다. 1375년 그의 가장 뛰어난 장군인 코케 테무르가 죽자 한족 지역 수복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11] 1373년 몽골은 요령성과 하북성 신하(信河)의 푸닌(Funin)과 수이진(Suijin) 지역을 정복하여 명나라를 요동에서 끊었다.[11] 1375년 요양성의 몽골 관리 나하추는 몽골의 권력 회복을 목표로 요동반도를 침략했고, 친몽골 여진족의 지원을 받아 성공했다. 이에 명나라는 북원에 대한 침략을 중단했다.[11]아유르시리다라는 명나라에 맞서기 위해 원나라의 옛 속국인 고려 공민왕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빌리그트 칸은 공민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칭기즈 칸의 후손" 운운하며 고려가 자신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하였으나,[10] 공민왕은 이를 거부하고 몽골에 대한 반대 정책을 시작했다.[10] 1374년 공민왕 사후, 이인임은 요양의 몽골에 사절을 보냈고, 빌리그트 칸은 우왕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빌리그트 칸은 고려에 명나라 요새에 대한 공동 공격을 위해 군대를 파병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고려 조정은 이 역시 거부했다.[10]
1378년, 아유르시리다르는 카라코룸에서 죽었고, 그의 이복동생인 토구스 테무르가 왕위를 계승했다.[11]
3. 가계
부친 | 원 순제 토곤테무르(元順帝妥懽帖睦爾) |
---|---|
모친 | 기황후 |
원비 | 오지라슨다리씨(瓦只剌孫答里氏) 또는 진다리씨(陳答里氏) |
황후 | 권황후(權皇后): 고려 권겸(權謙)의 딸[16] |
자녀 | 딸: 공주(公主) |
아들: 이름 무명 (1363년 3월 26일 ~ 1375년 5월 16일) | |
부마: 이수데르 조리그투 칸 | |
황후 | 김황후(金皇后): 고려 김윤장(金允藏)의 딸[17] |
자녀 | 아들: 마이다리 팔라(買的里八刺, Maidari pal) |
4. 평가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은 원나라 쇠퇴기에 황제에 즉위하여 어려운 상황 속에서 북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된다. 1373년 만리장성을 넘어 랴오닝 일대와 허베이성 일부 지역을 탈환하고, 코케 테무르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산서성 북부까지 장악하는 등 군사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13] 1374년 고려에 사절을 보내 명나라군에 대한 공격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10]
그러나 1374년 명나라의 대군에 의해 싱허와 가오저우를 빼앗겼고, 고려 공민왕은 그의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 1375년 랴오닝이 명나라 군대에 점령되면서, 그의 중국 재탈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13] 1375년 9월 17일 코케 테무르가 병사하자, 그의 노력은 더욱 힘들어졌다. 그는 끝까지 중국 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1376년 장군 바얀 테무르가 명나라에 투항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11]
1377년 고려에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고려 신하들은 북원과의 외교 단절을 주장했고, 결국 고려는 1377년 9월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15]
4. 1. 긍정적 평가
빌레그트 칸은 명나라의 침입에 맞서 북원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7][8][9] 그는 코케 테무르[8] 등 유능한 장수를 등용하여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고,[9][13] 고려와의 외교 관계를 통해 명나라에 대한 견제를 시도했다.[10]4. 2. 부정적 평가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은 권력 투쟁과 내분으로 국력을 소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4] 그는 황태자 시절부터 정치적 반대파와 대립하며[13] 내분을 일으켰고, 이는 원나라 군대의 약화를 초래했다.[14]또한 명나라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에 실패했다. 1372년 명나라의 공격을 일시적으로 격퇴하기도 했지만,[13] 결국 한지(漢地) 재탈환에 실패하고 몽골 고원으로 후퇴해야 했다.[13]
그는 중앙집권화와 개혁에도 실패하여 북원의 쇠퇴를 막지 못했다. 아버지 토곤 테무르가 정치에 의욕을 잃은 상황에서[13]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지만,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고 내부 권력 다툼에만 몰두했다.
고려와의 동맹에 실패하여 외교적 고립을 자초했다. 고려 공민왕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거절당했고,[10] 이는 북원의 외교적 고립을 심화시켰다.
4. 3. 종합적 평가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고 주원장이 홍무제로 즉위하면서,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잃고 몽골 고원으로 물러나 북원을 세웠다. 아유르시리다르는 이러한 혼란기에 황제로 즉위하여 북원을 이끌었다.[13]아유르시리다르는 원나라의 쇠퇴기에 황제에 올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 북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고려와 연합하여 명나라에 대항하려 했고,[10] 1372년에는 서달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를 격퇴하는 등 군사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9][13]
그러나 아유르시리다르의 통치 기간은 잦은 권력 투쟁으로 얼룩졌다. 그는 황태자 시절부터 정적들과 대립했으며,[14] 즉위 후에도 코코 테무르 등 유력자들과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권력 투쟁은 북원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명나라의 지속적인 압박과 1375년 코코 테무르의 죽음은 북원의 세력을 더욱 약화시켰다.[11] 내부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것도 그의 한계로 지적된다. 결국 아유르시리다르는 1378년 카라코룸에서 사망했고, 북원은 이후에도 혼란을 거듭하며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13]
5. 기타
6. 연호
소종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
서력 | 1371년 | 1372년 | 1373년 | 1374년 | 1375년 | 1376년 | 1377년 | 1378년 |
간지 | 신해 | 임자 | 계축 | 갑인 | 을묘 | 병진 | 정사 | 무오 |
연호 | 선광(宣光)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참조
[1]
논문
북원 昭宗 애유식리달랍 생년 고변
http://www.cnki.com.[...]
2000-07
[2]
논문
我国初唐时期(公元642年前后)西藏拉萨大昭寺古砖的考古地磁学研究
http://dx.doi.org/10[...]
1977-12-01
[3]
서적
A History of Korea
Palgrave
[4]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907–1368
[5]
서적
The Mongols: A history
[6]
서적
The Mongols: A history
[7]
서적
Mongol ulsyin tuuh: III boti
[8]
서적
Ming shi-Köke Temür's biography
[9]
서적
Mongol undestnyi nevterhi toli
[10]
간행물
고려사절요
[11]
서적
Organizatsiya progranichnoy slujbi na sever Kitay v epohu Ming: Kitay i Sosedi
[12]
서적
庚申外史, 蒙古源流, 新元史
[13]
서적
新元史
[14]
서적
元史
[15]
서적
新元史
[16]
간행물
고려사절요
[17]
간행물
고려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